과거 ‘극동(Far East)’이라 불렸던 동북아시아 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문명과 본격적으로 조우하면서 근대로의 문명적 전환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제국-식민지의 문명적 위계에 따라 문화적으로 타자화된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서구 문명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문화를 경시하는 문화적 습속을 형성했으며, 외부자의 문명적 시선을 가정하고 그들의 기준에 따른 인정과 지위 향상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근현대 동북아시아의 국가와 시민사회가 태생적 경로의존성을 바탕으로 공통적으로 지녀온 문화적 욕망이다.
200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문화 컨텐츠들이 해외에 수출되면서 형성되기 시작된 ‘한류(韓流, K-wave)’라는 현상은 매우 경이로운 사회문화적 사건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1990년대부터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주목받은 문화산업의 육성 및 투자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투여되었던 역사적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인 동시에 역방향적 전환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 ‘K’라는 수식어는 단지 글로벌 문화산업시장에서 각광받는 대중적 문화상품의 범주를 넘어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은 여러 가지 유·무형의 물건들, 각 분야의 세계 무대에서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인물들, 세계인들에게 새롭게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한 다양한 문화유산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3년간의 코로나 기간 우리에게 익숙했던 단어 ‘K-방역’은 ‘K’라는 글자가 갖는 활용의 폭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종다양한지, 그리고 사회 양극화와 사회 해체의 위기에 놓인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집합 정체성과 사회적 응집력을 창출함에 있어 ‘K’가 어떤 사회적 효과를 띠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학술대회는 ‘K’라는 기표에 담긴 대내적·대외적 의미를 진지하게 따져묻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난 사반세기 ‘K’의 짧은 역사를 돌이켜보면, 2000년을 전후하여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는 2010년대 후반부터 지문화(geoculture)의 중심부 세계에 정착했고, 이제 우리는 이전 세대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빌보드 차트나 오스카상에서도 심심찮게 ‘K-문화’의 쾌거를 목도하는 공인된 ‘문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 결과 우리는 서구-주류 문화권에서의 연이은 찬사와 인정을 통해 형성된 ‘국뽕’ 효과를 공기처럼 향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아시아 각지의 다양한 입장과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면, ‘K’는 길지 않은 형성사 속에서도 매우 다층적으로 변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후반 이란에서 보수적인 컨텐츠라는 이유로 환영받았단 ‘K’는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불온한 컨텐츠가 되었다. K-pop은 이제 기성세대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컨텐츠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K의 확산은 K의 사라짐을 부르고 있다. 주류가 되어버린 대중문화에 대하여 국적을 따지지 않고 소비하듯, K역시 점차로 자리를 잡아감과 동시에 국적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K가 이제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