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동아시아는 기억이 지배하는(memocracy) 공간이 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과거가 유토피아처럼 표상되며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는 레트로토피아(retrotopia) 현상은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매우 큰 설명력을 지닌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간다. 서로 다른 체제와 지향을 가진 동아시아 사회들이지만, 타자와의 경계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기억을 소환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들이 동아시아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식민의 기억을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전쟁의 기억을 소환한 중국, 중국과 다른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기억을 소환하는 대만과 홍콩, 주체의 길을 걷기 위해 지속적으로 침략과 저항의 기억을 소환하는 북한 등. 2010년대 동아시아 사회는 끊임없이 기억이 소환되고 또 재구성되는 공간이 되었다.
기억은 국가차원에서만 영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또한 동아시아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을 관통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도시들은 도시 재생을 통해 지역에 자리한 기억의 장소들을 보존하고 재구성해가고 있다.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한 이들 역시 지속적으로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2014년 이후 한국 사회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세월호에 대한 기억과 연계되어 있고, 남성지배의 오랜 역사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위안부의 기억과 연계되어 있다. 레트로와 뉴트로는 2010년대 젊은이들의 취향을 대표하는 개념이 되어있으며, 게임과 메타버스 등 디지털 공간은 기억의 재현을 둘러싼 새로운 길항이 발생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가 경험하고 있는 기억의 지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사회적 기억 연구가 그간 분석해온 것은 현재성의 측면에서 얼마나 유효성을 지니는가? 또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분석하여 시대에 개입할 것인가? 이 학술대회는 현 시기 동아시아에서 나타나는 기억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갈등에 관한 연구와 기억을 매개로 전환적 정의를 실천하고자 이뤄진 기억 연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기억의 재구성, 사회 변혁을 위한 기억의 소환, 일상에서 반복되는 기억의 소비, 게임과 메타버스 등 디지털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는 기억의 재구성 등 메모크라시의 시대 동아시아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기억을 주제로 삼는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기억의 지배라는 사회상 속에서 어떻게 사회적 기억을 연구할 것인가를 말하기 위하여 사회적 기억연구를 회고하고 또 미래를 전망하여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