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이하 당대회)가 끝났다. 중공당 당대회가 국내외 주목을 받은만큼 대회 결과와 영향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우려와 걱정의 시각이 적지 않다. 특히, 시진핑 주석 개인에게 집중된 더욱 강력해진 권력은 대외적으로 공세적인 형태로 표출될 것이라는 시각이 널리 퍼졌다. 국내적으로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이견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 경직성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국내외 우려에도 불구하고 20차 당대회 [보고]를 통해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기치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시진핑 주석이 강조했던 여러 의견이나 견해를 집단의 결의를 통해서 <당장>에 삽입했다. 이런 점에서 중공당 20차 당대회는 사실상 시진핑 주석 ‘일인체제’의 공식 출발을 알리는 대회였다. 즉, 덩샤오핑 시대의 유산을 뛰어넘어 본격적인 ‘시진핑 시대’의 진입을 알렸다.
5년 전 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18차 당대회 이후 중국은 공식적으로 ‘신시대’에 진입했다”라고 선업했다. 특히, 19차 당대회 [보고]에서 중국은 ‘혁명과 건설, 개혁의 시대’에서 ‘혁명’, ‘건설’ ‘개혁’의 시대로 신중국 역사 시기를 삼분했다. ‘혁명의 시대’는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과 신중국 건설, 문화혁명과 마오쩌둥 사망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마오쩌둥의 ‘무오류’의 절대적 지도자가 통치하던 시기인 동시에 계급혁명과 계속혁명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건설의 시대’는 문화혁명 등 좌편향의 오류를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기이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집권 시기를 말한다. 1980년대부터 18차 당대회 개최 전 2010년대까지 대략 30여 년의 시간대에 속해 있다. 이 시기는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실용적 사고를 통해서 중국 사회주의를 개조하던 시기였다. 가치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오로지 경제적 성과로서 증명하던 시기였다.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에 필요할 경우 자본주의 방식도 과감하게 도입했다. 그리고 심지어 이를 <당장>에 삽입하여 당국가체제 운영의 근간으로 삼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은 그동안 명시적이며 공개적으로 개혁개방을 부정하거나 폄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대와 19대를 지나오면서 끊임없이 ‘신시대’를 강조하면서 개혁개방의 유산을 덜 중시하거나 덜 강조하는 방식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해왔다. 시진핑 주석은 18대, 19대, 20대 [보고] 기초조 조장을 맡으면서 자신의 구상을 [보고]에 담았다. 그리고 [보고]의 내용 구성 또한 18대 12장, 19대 13장, 20대 15장으로 계속 늘려왔다. 또한, 자신의 미래 중국 건설과 비전에 대한 종합 구상을 <당장>에 삽입하여 권위를 공식적으로 확보했다. 이번 당대회의 정치 목표 내지 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당의 영도 확대 심화 △대외적으로 국가 지위 강화 △과학기술혁명의 자주화 추진 △안보 강화 등이다. 당의 영도 강화는 개혁개방 시기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당위 영도가 이른바 중국특색 사회주의를 착근시키는 근간이자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위 강화, 과학기술, 안보 등 문제는 시진핑 시기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문제들이다. 기존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오면서 이전 시기와 다른 새로운 시기를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이를 시기가 아닌 시대로 인식하면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는 사회생산력이 가장 중요한 중국식 사회주의의 평가 기준이자 검증 수단이었다. 그러나 시진핑 시대는 이러한 경제 중심 방법론을 중시하기 보다는 역사와 시대, 인류문명 차원헤서 개혁개방 시대와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먼저, 혁명과 건설, 개혁의 시대가 아니라 혁명, 건설, 개혁의 시대로 역사를 삼분하고 있다. 개혁개방 시기의 개혁이 아니라 이전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만들고자 한다. 둘째, G2 시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은 개혁개방 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 더 이상 어두운 동굴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를 만들어가는 것을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다. 셋째, 중국이 일국 사회주의에서 벗어나 이제는 마르크스주의를 충분히 구현하고 체화하는 인류 공동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중국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국가로의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진핑 주석의 집권 연장은 역사, 시대, 인류 차원에서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중국을 쫓고 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도 덩샤오핑 시대의 유산과는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 20차 당대회를 계기로 표출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대, 19대, 20대 당대회 [보고] 문건의 최종 책임자는 시진핑이었다. 10년 주기 집권 관행에 따르면 두 번째 임기 5년 말에 개최되는 당대회는 차기 후계자가 기초조 조장으로 미래 변화를 그려가는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2012년 18차 당대회 [보고]는 17대 중앙위원회의 업무보고에 관한 것이었으며 보고자는 시진핑이 아닌 후진타오 당시 총서기였다. 그러나 그 문건의 기초는 차기 지도자로 올라선 시진핑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18대 [보고]부터 19대, 20대 [보고]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중국 당과 국가의 비전과 전략 방향을 오롯이 시진핑 주석의 책임 하에 설계되고 기획되었다. 그리고 그 근저에서는 기존 시대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의 기대와 열망이 녹아 있었다. 여기에 형식적인 관행의 지속이 있었고, 내용적인 관행의 파괴가 병존했다.
먼저, 형식 측면에서 세 시기 모두 관행은 방기되거나 파기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예를 들어, 시진핑 주석이 기초조 조장으로 참여한 [보고]의 주제는 일관되게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18대는 “확고부동하게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전진하여 소강사회를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분투하자”, 19대는 “전면적인 소강사회 건설에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자”, 20대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기 위해서 단결 분투하자”였다. 또한, 대회 개최에 이르는 과정 또한 기존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년 6개월 전부터 [보고]에 대한 의견 수렴 작업이 시작되었다. 2021년 19기 6중전회에서 20차 당대회의 2022년 하반기 개최를 공식 발표했다. 2022년 8월 30일 정치국 회의에서는 20차 당대회 개최 날짜를 확정 발표했다. 당대회에서 논의할 내용은 2022년 9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19기 7중전회 토론 내용 제안 형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22년 10월 15일 대회 주석단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폐막일까지 공지하면서 회의 개최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이 기존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 측면에서는 우리가 기존에 관행으로 익숙하게 알고 있던 내용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선, ‘7상 7하(七上八下)’나 ‘격대지정(隔代指定)’ 등 지도부 교체에 관련된 덩샤오핑의 유산은 더 이상 관행의 이름으로 유전되지 않았다. 19대에서 왕치산의 은퇴 등 엄격하게 적용했던 ‘7상 8하’는 이번 20차 당대회에서 적용되지 않았다. ‘격대지정’은 이미 19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용도가 사실상 폐기되었다. 이러한 기존 관행 혹은 관례의 방기 내지 용도 폐기는 덩샤오핑 시기의 정치적 유산과의 고별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향후 일정 기간 덩샤오핑의 정치적 유산을 재해석하거나 선택적으로 채택하면서 덩샤오핑의 유산을 지우고 시진핑 시대의 정치적 유산을 담금질하는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이러한 출발점에 선 것이 바로 20차 당대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관행 혹은 관례로 익숙하게 설명되어지던 많은 것들이 시진핑 시기에는 새롭게 해석되고 필요에 따라 폐기되고 용도 변경될 것이다. 20차 정치국 상무위원회 인사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줬고, 기존 관행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시진핑식 정치 변화의 출발을 알렸다.
20차 당대회 인사 구성 관련하여 주목을 끈 것은 이른바 집단지도체제로 알려진 정치국 상무위원회 구성의 파격이었다. 18대는 원로정치의 유산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계파 간 안배를 통한 균형 인사가 이루어졌다. 공청단 계열의 리커창이 건재했고, 장쩌민 계열의 장더장, 위정성 등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이러한 흐름은 19대 정치국 상무위원 구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리커창, 왕양, 한정 등 당내 존재하는 다양한 정체 세력들이 권력을 분점하는 형태로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을 유지했다. 그러나 20차 당대회의 정치국 상무위원 구성은 완전한 시진핑 세력 일색으로 채워졌다. 특히 비서 혹은 직계 부하 출신이던 리창, 딩쉐샹, 차이치 등이 집단지도체제에 진입했다. 이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유지돼오던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을 사실상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집단지도체제 내에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합의 구조라는 덩샤오핑 시기 정치적 유산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집단지도체제를 형식적으로 규정하는 내규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실상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집단지도체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시진핑 주석의 이른바 ‘1인 체제’의 도래를 의미한다. 형식은 나중에 시간을 두고 필요에 따라 조정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정치국 위원 구성이나 중앙위원 구성은 기존 관행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고 기존 관행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정치국 위원의 구성은 18대 25명, 19대 25명, 20대 24명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치국 위원 교체 흐름 또한 큰 변화는 없었다. 18대에서는 정치국 위원 가운데 류옌둥, 왕양, 리위안차오 등 세 명만이 연임했고, 19대에서는 쉬치량과 순춘란, 후준화 등 세 명만이 연임하고 나머지는 모두 교체되었다. 20대에서는 장여우샤, 천민얼, 황쿤밍, 리홍중 등 네 명이 연임하고 나머지 13명은 모두 신규 인사로 교체되었다. 적어도 정치국 위원 인사 교체는 집단지도체제 구성에서 친정체제를 구축했던 것과 달리 기존 교체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는 등 선택적 적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집단지도체제를 완전히 장악해야 하는 필요성이 더 간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변 정치국 위원 교체를 둘러싼 기존 관행의 완전한 파괴는 아직은 덜 중요한 문제였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적어도 점진적인 변화 과정을 가겠다는 기존 방식에서 완전히 유리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앙위원 인사에서도 기존 관행과 유사한 엘리트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 비율 또한 100명 정도가 교체된 것으로 18대, 19대에 비해서 현격하게 두드러진 결과는 아니다. 이는 앞서 얘기한 대로 집단지도체제를 완전히 틀어쥔 상황에서 급격한 변화에 다른 정치적 리스크를 줄여나가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중앙위원 정위원 가운데 여성이 11명 정도에 그친 것은 정치국 위원에 여성과 소수민족을 배려한 기존 관례에 따른 인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엘리트 정치의 남성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후보위원 인사를 보면 세대교체의 기대와 희망이 녹아 들어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20차 당대회에서 기존 관행에 부합하는 단계별 인사를 진행하면서도 파격 발탁도 중요하게 고려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00여 명에 이른 성부급 부직 이상 ‘70후(後)’ 인사 가운데 약 30여명 정도가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70후’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정치의 이른바 파워엘리트 대열에 진입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세대교체를 통한 통치 정당성의 강화는 시진핑 주석이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가는데 동력인 동시에 ‘70후’들도 성장의 기대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들은 시진핑 주석의 장기집권에 적극 부응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것이다.
집단지도체제의 완전한 장악은 향후 중국 정치 변화에서 시진핑 주석 개인의 의지가 강력한 추동력이 되고 변수가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제반 권력 강화 및 공고화 과정에서 시진핑 주석의 권력 의지는 견제와 균형이 무력화된 현 상황에서 더욱 강력하게 발현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지나친 권력 확대는 자칫 ‘무오류’의 절대자로 간주되었던 마오쩌둥의 그림자와 오버랩되는 부정적인 효과를 차단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이번 당대회에서 제시된 것이 이른바 당의 영도 강화와 법치 중국의 구현이다. 특히 전면적인 의법치국 견지와 법치 중국의 건설과 추진은 [보고]에서 독립된 장으로 따로 분리하여 강조할 정도로 향후 시진핑 3기 순항에 중요한 제도적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시기 법치나 의법치국 관련 내용은 18대 [보고]에서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정치발전 경로와 정치체제개혁에서 그리고 19대 [보고]에서는 사회주의 민주정치 발전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번 20차 당대회 [보고]에서 독립된 장으로 언급됨으로써 강력한 권력 집중으로 야기될 수 있는 이른바 ‘1인 지배’의 부정적인 효과를 완화하고 비판을 우회하는 차원에서 의법치국과 법치를 더욱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법치 중국 건설이 기존 의법치국 논의와 마찬가지로 법을 통한 지배 강화의 원칙에 부합하는 가치적 개념이 아니라 법을 이용하여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는 일종의 수단적 가치로 활용된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대 [보고] 전 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이른바 당의 영도와 ‘두 개 확립’에 모든 정책과 조치가 조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당국가체제의 필요와 요구에 부합하는 차원에서 법치가 고려되기 때문이다. 즉, 중국에서 법치라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적어도 당의 통치를 원활하게 구현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이기 때문에 법치가 목적이 아닌 이상 법치 중국 건설 역시 시진핑 3기의 통치와 집권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로 활용될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 시진핑 3기의 집권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기능으로서 법치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법을 통한 지배를 강화하는 것이지 법에 의한 지배를 강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핑 3기에는 법적인 구속력을 강화하는 다양한 조치를 취해 나갈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을 것이다. 개인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그리고 개인의 의지가 정책으로 관철될수록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를 법적인 조치로 뒷받침하는 작업이 필수이다. 그래야 개인 권위에 기초한 정책 추진의 불합리성의 리스크를 줄여나갈 수 있고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 실행과정에서 그 근거가 되는 최고 지도자 혹은 집단지도체제 내부의 결정이 법과 제도에 의해서 보장되는 과정이 요구된다. 가령 후춘화의 중앙위원으로 강등이라는 인사 결정 또한 이러한 내적 규정에 의해서 그 불가피성을 환기시키고 정치적 결단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예컨대, <당정 영도간부 직무 임기 잠행 규정(党政领导干部职务任期暂行规定)> 제6조에 의하면, “당정 영도간부는 동일 직위에서 연속해서 두 임기에 도달하면, 더 이상 동일 직무에 추천, 지명 또는 임명되지 않는다(党政领导干部在同一职位上连续任职达到两个任期,不再推荐、提名或者任命担任同一职务)”. 19대에서 리위안차오와 류옌둥이 정치국 위원에서 은퇴하고, 왕양이 승진 이동하여 살아남았던 사례 역시 이 규정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18대와 19대 정치국 위원을 역임한 후춘화를 상무위원으로 올리지 않는 내적 규정으로 이 조항을 활용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정치 변화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도 법치 강조는 매우 유용하다. 20차 당대회에서 의법치국과 법치 중국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차 당대회는 사실상 시진핑 주석의 장기집권의 출발을 의미한다. 20차 당대회를 시작으로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돌이켜보면 이미 18대 이후부터 꾸준히 집권 연장을 준비해왔다. 혁명과 건설, 개혁의 시기를 혁명, 건설, 개혁의 시기로 세분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진정한 개혁의 시기에 적합한 자신이 오랜 기간 집권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정치를 지난 10년 동안 해 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대 반부패 투쟁, 19대 소강사회 건설 매진 등 일련의 과정은 모두 20차 당대회 이후 장기집권의 길을 열기 위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하는게 타당하다. 권력이라는 것은 한 번 잡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내려놓고 싶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진핑 주석은 10대 시절에 겪었던 옌안 토굴에서의 경험이 강력한 국가, 위대한 공산당의 신화를 만들어냈고, 그러한 이상적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권력의 획득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은 마오쩌둥 사상을 총화하고 이를 당의 지도사상으로 당장(黨章)에 적시하면서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시진핑 주석 또한 ‘두 개 확립’이나 ‘두 개 수호’ 등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강력한 사상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의지까지 발동할 경우 집권 연장은 한 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근거 중 하나가 바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회 구성을 보면 그 안에서 후계자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딩쉐샹 정도가 ‘60후’의 선두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보면 최고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국내외 언론 등 다양한 관찰자들 또한 딩쉐샹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지 않고 있다. 다만, 제도적으로 현 총서기 제도를 당주석 제도로 회귀하여 관리형 총서기를 두고 당쉐샹이 그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1982년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제도를 부활시켰던 당시 정치상황에서 과도한 권력을 제한한다는 주석제 폐지의 정당성이 4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유용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당주석 부활은 완전한 의미의 영구집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한층 더 신중한 조정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 집단지도체제는 일시적인 과도기라고 봐야 한다. 적어도 시진핑 주석의 개인 권력 의지가 확인된 이상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제약하는 매스를 들고 자신을 수술대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리적 나이 또한 정상적인 임무 수행에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 중앙위원 이상 간부군에서 후계자를 찾을 수 밖에 없다. 누가 될 것인지는 오로지 시진핑 주석의 개인 의지에 달려 있다.
적어도 이번 최고 지도부 구성이 일시적이고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체제라면 빨라야 5년 후에 후계자가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현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 가운데 5년 후 21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여 후계자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시진핑 주석은 적어도 지금부터 10년을 더 집권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2032년 22차 당대회에서 권력 이양을 하지 않는다면 후계자를 2032년 22차 당대회에서 올리고 자신은 후계자 경험 축적 과정을 지켜본 후 2037년 23차 당대회에서 은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나라오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그룹이 바로 ‘70후’들이다. 이들은 앞서 지적한대로 ‘60후’들이 일종의 과도기 권력을 행사하고 물러나게 되면 더욱 최고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기대를 갖고 있는 그룹이다. 시진핑 주석 또한 세대교체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 바람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대 중앙위원회 인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70후’들이 중앙후보위원에 진입했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일부는 2027년 2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진입할 것이다. 빠르면 이들은 2032년 2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진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2037년 23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여 후계자로 등극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 차기 구도와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이들 ‘70후’에 대한 폭넓고 깊이있는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 이들과 시진핑 주석과의 이해관계를 생각한다면 20차 당대회 가장 핫한 이슈는 바로 이들의 중앙위원회 진입이기 때문이다.